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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한말 '친미기독교파' 대안을 제시 하다
    ▲ 함재봉 박사(한국학술연구원장)은 연구와 발제를 통해 한국인다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논했다. 함재봉 박사(한국학술연구원장, 정치학박사)는 종로목요서평이 지난 2월 22일 개최한 제 22회 서평에서 '한국사람만들기Ⅲ(H프레스, 국판 1005페이지)'에 대한 발제를 담당했다. 함 박사는 '한국사람의 계보학'이라는 대 주제로 한국인과 한국인의 문화 및 이를 둘러싼 정치, 경제, 문화, 역사 등을 총 망라해 현재까지 4권의 연속도서를 집필했으며, 그는 한국인을 친중위정척사파와 친일개화파, 친미기독교파, 친소공산주의파, 인종적민족주의파 등으로 구분해서 순차적으로 연구와 집필을 진행하고있다. 제 22회 종로목요서평에서는 '한국사람만들기Ⅲ(친미기독교파Ⅰ, 초판 4쇄 발행 2022년 12월)'에 대한 논의를 다뤘다. 이날 조선시대의 한국인이 현재의 한국인으로 되어져가는 과정에 대해 일련의 연구를 진행해 온 바, 한국에 교회가 120년 전 구한말에 전래된 이래 한국인에게 전인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약 5백년 전 유럽의 루터나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이 천주교세상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교의 세상으로 바꾼 과정을 연계해 설명하는 한편 동 시대에 중국과 일본의 정치와 사회가 변화된 과정에서 역시 그리스도교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을 대입해 입체적인 논증을 진행했는데 함 박사가 판단기준으로 삼았던 계보학(genealogy), 특히 푸코의 계보학을 언급함으로서 연구철학의 근본을 제시했다. 함 박사는 영웅이 역사를 만드는 것인지 시대가 인물을 만드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이 분야에서 첨예하다고 설명하고, 이 논의를 학술적으로 말하면 주체와 구조에 관한 논쟁이 되며, 근대적 주체가 근대를 만드는지에 논쟁으로 귀결되는데 그 둘은 상호영향을 미치는 순간의 과정(2백~3백년에 달할 수도 있음)을 연구하는 계보학적 입장에서 기술되었다고 설명했다. 함 박사는 조선-한국의 근대화를 연구했고, 푸코는 서구의 근대화(100~150년이 소요)를 연구했는데 서구의 근대화는 없던 길을 개척했다면 구한말 한국은 벤치마킹할 만한 서양의 근대나 일본의 근대 등 참고 할 만한 모델을 이미 갖고있었다는 것이라서 한국사람의 5가지 종류를 설정할 수 있었음을 밝혔다. 동 서평에서는 5가지 중 하나인 친미기독교파가 조선 사람들을 봉건 체제에서 이끌어내 근대 한국인으로 만드는 노력기울이던 과정 중 나머지 4가지 종류의 한국인들과의 경쟁의 상황을 겪었고, 당대 주류사상이었던 주자성리학을 타파하고, 대안으로서 기독교사상을 제시하며 오늘날 부강한 한국으로 변화시켰던 정신사상의 프레임을 분석해냈다. 함 박사는 앞으로 제 5권을 통해 제시할 '친미기독교파2'는 한국기독교가 조선체제주류인 주자성리학의 격하, 중화문명을 대체할 새 문명의 제시, 한글사용을 둘러싼 문체혁명, 새 나라의 계층의 육성을 다룰 예정이라고 미리 밝혔으며, 이날 토론은 3권 '친미기독교파1'의 주제인 칼뱅주의적(청교도적) 사고방식(현재 개신교사상의 주류를 이루는)과 삶의 양식, 칼뱅주의장로교식 민주주의, 한글 등에 대해 집중해 발제했다. '한국사람만들기Ⅲ(친미기독교파Ⅰ)'에는 칼뱅주의신학이 본토 유럽과 미대륙에서는 지역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다뤘고, 아시아 내 한국, 일본, 중국 등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비교분석하는 방식으로 기술되었다. 현재 한국 그리스도교 중에는 칼빈주의적 원리를 따르는 장로교가 최다 종파인 것으로 보이는 현실에 맞춰 구한말 한국에서 진행된 조선봉건사회를 혁파하고, 기독교적인 문화를 이식해놓은 과정을 상세히 설명했다. ◎ 조선 근대화는 민간과 기독교사상이 주효 조선으로 건너온 해외 개신교 선교사들은 칼뱅주의의 신학과 제도, 복음주의로 무장했고, 조선인의 일상을 개혁하는데 중점을 뒀다고 함 박사는 평가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유교가 악이며, 이단이라고 설파하면서 조선의 국교인 주자성리학과의 타협 일체를 불허했는데 이는 마치 한국의 서기 1000년 대에 국교였던 불교를 주자성리학이 정면도전하며, 국가이념으로 대체해나갔던 모습을 연상케한다고 밝혔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주자성리학의 주축인 제사를 우상숭배라며 금지하고, 양반과 상놈으로 구분된 봉건적 신분제를 공격하면서 교회 내에서 남녀노소 무관한 평등주의를 도입했으며, 이 뿐 아니라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씨앗을 뿌리는 등 노력으로 개신교회가 세워지고, 개신교도가 늘어나면서 조선인들에게 미국 기도교가 체화되면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자유주의가 자연스레 습득되는 과정을 거쳤다고 분석했다. 세종대왕이 과학적인 한글을 창제했지만 한국의 지배층은 이를 방치해온 상황이었는데 개신교 선교사들은 성경책을 한글을 사용해 번역해 대거 보급을 시작함으로서 상민과 천민이 처음으로 글을 체계적으로 배웠고, 한글을 사용해 배제학교와 이화학교 등 서구식 근대교육이 진행되어 문화마저도 바꿨던 이른바 기독교종교 등 민간주도의 형식이었음을 분석했다. 칼뱅주의는 유럽에서 근대로 넘어서는 사상적 분수령이었지만 한국에서는 성리학적 봉건주의를 넘어 근대주의로 가는 촉매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 일본의 근대사회화는 국가 중심으로 귀족과 하급무사의 협력 일본은 미일화친조약(1864년)을 맺은 후 반막부세력에 의해 천황의 이름으로 일으킨 궁정구데타로 막부를 해체한 이후 메이지유신(1868년 10월 23일)으로 쇄국에서 개국으로 방향을 전환해 제국으로 변모한 과정을 설명했으며, 일본은 그간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유지해온 관습과 제도, 근대사회로 한걸음 나아갔으나 한국과는 달리 행정관료와 천황 등 국가주도의 변혁이었다고 분석했다. 일본의 개혁을 이끈 세력은 메이지 과두들이었고, 이후 조슈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나 이노우에 가오루, 오쿠마 시게노부 등이 핵심이었다가 조슈와 사쓰마 출신자들이 주도권을 잡는 여정이 있었지만 대부분 해외 유학파 지식인들로서 일본 상층부 인사들이었고, 조선과는 달리 천황제와 총리 책임제의 융합, 행정체제 보완을 통해 귀족과 하급무사출신 등 모두를 포용하는 방식으로서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 일본 내 낡은 구체제를 서구의 기술과 정치 및 사회체제라는 대체제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강력한 국가가 된 과정을 함 박사는 설명했다. ◎ 중국 귀족의 근대화는 개선을 추구했고, 국민은 변혁을 우려함 중국은 구미열강을 접촉하는 시기부터 반외세주의를 표방했는데 중국도 충분히 선진화되었기 때문에 서양을 따르고 모방할 이유가 없으며, 서방을 모방해서는 서양을 격퇴하는데 도움이 안될 뿐 아니라 조정에 대한 민심만 이반할 뿐이라는 입장이었다고 함 박사는 설명했다. 신유정변(1861년)이라는 궁정구데타를 일으킨 서태후와 공친왕 혁흔은 양무개혁(유럽 근대기술의 도입으로 봉건체제를 유지하고 보강하려 했던 청나라의 자강 운동)을 일으켜 개혁을 추진했지만 실패로 돌아간 이후 아편전쟁이나 중일전쟁의 패배를 맛보게 되었는데 권력층에서는 개혁을 필요로 했지만 전폭적이지는 않았고, 하층민의 인식도 부족했음을 함 박사는 분석했다. 중국의 보수주의 등 국민들은 서양 오랑캐의 군사기술을 배움으로서 중국도 오랑캐가 되지 말고, 유교의 전통가치인 인의예지를 지킴으로서 서양의 야만인들을 감동시키고 굴복시키자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중국 내 철도의 부설은 오히려 외적에게 교통수단을 제공할 우려가 크고, 탄광의 개발이나 철도부설, 전신망 설치, 교회 건축 등은 모두 풍수를 해치고, 우주의 운영을 방해해 농사를 망치거나 농업을 망치는 등 국민의 안녕을 해친다는 보는 시각도 많았음을 기술했다. 유럽에서 칼빈이나 루터, 뮌처 등 종교개혁가가 등장하기 전까지 오랜 세월동안 천주교가 천부적 권력을 주장하며 교황이 국가와 국민 모두를 지배하는 봉건사회였지만 칼뱅주의자 등 개신교가 등장해 성경을 중심으로 한 이신칭의적 사상을 주장했고, 결국에는 근대사회건설에 기여했다는 내용을 설명했다. 선악과 사건으로 인해 모든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문제의 속죄함과 구원을 위해 중세시대 내내 함 박사는 천주교의 "교황주의자들이 지금까지 자랑스레 봄내왔듯이 그리스도르 바침으로써 인간과 신간의 화해를 도모하는 것"이 주요 화두였다면 칼뱅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복음에 복종하도록 함으로서 인간을 하나님의 제물처럼 바치는 것"이라고 서로 다름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고 분석했다. 중세시대의 교회는 실낙원 이후 결별한 신과 인간을 화해시키는 신의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주장했고, 칼뱅의 개신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는 불가능해졌고, 인간의 노력으로는 안되고 오직 신의 일방적 구원만이 가능하며, 아무런 댓가 없이, 공로 없이 신의 절대적 사랑으로만 가능하다고 보는 차이점을 제시했다. 공포스러운 현실에 처한 인간들은 신과의 화해는 불가능하지만 이 현실을 인간의 힘으로 정치적으로 극복이 가능할 것으로 믿었고, 극복를 위해서 사적으로는 극단적인 자기 제어와 자기 기율적인 삶을 살고, 공적으로는 체계적 규율을 통한 불안감과 공포, 근심걱정을 극복하는 신에 대한 절대 복종을 추구하며, 나아가서는 세속의 문제에만 집중해 수령이나 법령, 전쟁, 세속적 관습 등을 동원해 잃어버린 에덴 동산을 대신할 속세의 질서를 건설하고자 했고, 이 공동체건설에 칼뱅을 따르는 사람들이 참여할 것을 요구했지만 참여 대상에 왕이나 시민 등 차별은 없었음에도 개인에게 보다는 제도와 조직에 의존하는 방식이었음을 설명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카톨릭이 폐지되고 개신교가 국교가 되었으며 귀족과 시민, 목사가 참여하는 국가언약이 선포되었다. 영국과 미국에서 청교도혁명이 각 각 발생해 민주적국가체제가 만들어지고, 개신교와 근대국가가 형성 되는 등 칼뱅주의나 종교개혁주의 등이 근대국가성립에 많은 영향을 줬으며, 구한말의 한국 특히 개신교를 중심으로 사회체제를 변혁시켜 오늘의 한국인으로 발전되어지는 내용들을 이 책에 담고있다. '한국사람만들기Ⅲ'는 서방의 종교개혁으로 인한 근대사회건설과 아시아 3국의 개항과 사회변혁 및 근대사회건설 등의 이야기를 수록했으며, 1,005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책의 규모는 각 주제에 대한 자세한 근거와 전개과정이 꼼꼼히 담겨있다. <한국교회신문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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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2024-03-15
  • 3.1운동은 세계적 운동이며 한국교회 노력
    '3.1운동과 한국교회'를 주제로 한 토론회가 대한민국과한국교회포럼의 주최와 자유통일을위한국가대개조네트워크자유수호분과의 후원으로 지난 2월 27일 서울글로벌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개최되었다. 주제 발제자로 민경배 박사(전 서울장신대학교 총장)가 '3.1운동과 한국교회-한국교회의 세계사'를 발제했고, 류석춘 박사(전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원장)은 '3.1운동과 이승만 기획설'을 주제로, 류금주 박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는 '국부 이승만 한국교회 비전'을 주제로 각각 토론순서를 담당했다. ▲ 민경배 박사는 1919년 한국이 일제에 병합되어 식민지의 신세가 되었지만 일본제국에 굴하지 않고, 3.1독립만세운동을 벌였는데 이 운동은 한국인 특유의 세계지향적이고 혁신적인 성격에 더해 세계적인 종교인 한국기독교의 사상과 실행력에 맞물려 독립을 이룸은 물론 오늘의 부강한 국가로 자리매김 한 토양이 되었음을 분석했다. 민 박사는 대한민국(대통령 윤석열)의 건국과 관련해 헌법 전문에 '3.1운동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이 수록 되었기에 역사적인 구체적 가치와 대의에 기초한 국가임이 확인되며, 이는 기독교의 성육신적 구제척 가치라는 프레임과 병행하는 구조라는 전제를 밝혔다. 한국 교회는 현재 격랑 속에 있으며, 대한민국도 건국 이래 최악의 내적 갈등에 혼미한 것처럼 보여도 한국인과 한국교회는 1919년 일제의 통치를 거부하며 3.1독립운동을 일으켰던 긍지의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다. 3.1독립운동은 전국의 기독교회는 물론 전 종교와 전 민족, 전 계층이 혼연일체로 진행한 유일한 운동이었고, 한국근대사의 보감(寶鑑_보배로운 거울)으로서 그 견인과 동력원은 기독교교회였다는 내적 사실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세계 1차 대전 후 세계가 격동에 빠졌을 때 윌슨 대통령(미국)의 민족자결주의와 전후의 경제적 타격, 고종 붕어(崩御) 등으로 갈피를 잡기 어려웠음에도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 3.1독립운동이 교회의 주도로 터진 사안이라고 정의했다. ◎ 3.1운동은 세련된 사람들이 주도했다_ 3.1운동 당시의 묘사는 조선총독부 소요복명서(1919년)에 폭민의 미신적 광열은 시체와 피를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으로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기독교의 순사적 광열을 연상시킨다고 표현되었고, 중국 간도의 모 신문에는 대다수는 종교 신자, 이 군중의 대부분은 기독교 및 천주교 신자라고 기록했고, 산께이신문(2019년 11월 8일)에 나온 글은 3.1운동을 기독교를 사용한 선동, 독립운동 주동자의 과반수가 기독교지도자들이었다는 기록들을 들어 기독교적인 문화가 있었다는 설명을 했다. 당시 '독립단통고문'이 전국에 나 붙었는데 성경말씀으로 한 주일 내내 연독 할 것, 매일 3시에 기도 할 것, 주일에 금식 할 것, 성경은 매일 읽되,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지속할 것 등이 수록되어 기독교적 배경을 갖고 있었음을 밝혔다,. 3.1독립운동관계자의 처벌에서 기소자중 기독교인은 전체의 25%이고, 기독교입감자는 1,967명으로 전체의 15%에 달하는 등 감옥에 간 인원 중 기독교인은 40%였다고 설명했다. 일제는 한국 통치 초기부터 한국개신교회를 가장 문제시 했는데 당시 장로교독로회인 한국교회는 행정적으로는 전국조직이고, 문화적으로는 자율적이어서 일제의 입맛대로 통제하거나 비민족화, 동화시킬 수 없는 상대이므로 강경하게 다룰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민 박사는 일제는 교회가 이처럼 거대하고 신령한 힘의 권위가 있었고, 가장 개화되고 친취적이었다는 점을 몰랐던 것이 주요한 패착 원인으로 평가했다. ◎ 기독교가 3.1운동을 주도했다_ 민경배 박사는 한반도의 지도를 펼쳐서 3.1운동 격전지를 구분해보면 격전지마다 당시 한국교회가 있었거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던 지역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지리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한국의 근대시대에 지도급인사들 또한 대거 기독교회 출신 인사였다고 밝혔다. 이승만(초대 대한민국 대통령)과 안창호, 서재필, 유길준, 이원긍, 박승봉, 길선주, 최병헌, 한석진, 함태영 등의 명단이 이를 증명하고, 한국의 개화파도 이러한 계보가 반복되는데 이들이 곧 세계기독교회들과 단단한 연결점을 갖고 있었고, 공산주의계 지도자들은 1920년대 부터 등장하는데 초기의 이동휘, 여운형, 김규면, 현순 등도 역시 기독교회인사들로서 주도했다고 밝혔다,. 한국교회는 당시 최초로 전국을 대상으로 자발적 민족동력동원체제가 입체화되어있었고, 교회 특유의 민주주의 대의 지역체제(총회-대회-노회-시찰회-개 교회당회-제직회-공동의회)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이 인적, 문화적 고속도로를 독립운동에 접목할 수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세계사적으로도 한국교회는 묘하세 초창기부터 세계적 범위와 시각을 자랑했는데 1892년 찬송가에는 만왕, 만국, 만민이라는 단어가 흔히 등장하고, 끄릴난 어름산, 산호섬, 아프릭, 더운 강 등의 개념이 등장했으며, 1907년 정미조약으로 망국의 걱정이 막중했지만 한구교회는 행사마다 회의장에 만국기(萬國旗)를 설치했고, 세계대전 후 민주주의나 자유, 인권이 억압받고있는 그런 문제가 일제의 의해 한국에서 자행되는 것이 문제라는 등의 국제적인 현안의 문제를 고민하는 등 국제정치에도 민감 했다고 한다. 당대 세련된 한국인들과 성도들은 3.1독립운동을 통해 동서와 좌우, 상하가 없이 한 몸으로 궐기를 끌어갔고, 이 결속은 종교와 신분을 뛰어넘어 이발사와 수레꾼, 잡화상과 교사 및 승려, 학생과 재봉업자 등 모든 직종이 동행했던 장정이었는데 그러한 동원력과 실행력의 원천이 기독교회였다는 평가다. 총독부의 악덕한 국가정책도 비판했는데 1918년 총독부 전매청은 주초와 아편을 다뤘는데 주초세가 세수의 46%였고, 아편 관련 집행한 예산이 미화 18만 2천불, 유곽 건설에 미화 5십만불을 소모하는 정책을 쓴 결과 민 박사의 초등학교 담임 선생 2명이 아편쟁이였을 정도로 한국인들은 저변이 고통 받았는데 이러한 비도덕적 정치행위에 저항한 도덕적 대의도 있었다는 설명이다. ◎ 한국기독교 역사는 3.1운동 관련 1차 자료_ 3.1 독립운동을 총독부는 매섭게 진압했고, 이 때 발생한 피해는 누군가는 기록하고 전파해야 했지만 언론이 통제된 상황에 정확한 규모를 알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웠고, 한국교회가 각종 보고서와 문서에 정확한 기록을 한 것은 오늘날의 중요한 국가적 사료로서 가치가 돋보인다고 민 박사는 강조했다. 일제의 보도관제가 심해 일본 도꾜 언론에도 3월 7일에야 보도가 시작되었고, 코리애미션필드나 기독신보도 침묵했으며, 외국에 체류한 박은식과 김병조, 신흥우, 정한경 등이 관련한 글을 작성했지만 분노의 감정으로 인한 신빙성문제, 일본 군경의 기록은 역시 소요의 과장 또는 피해축소의 등으로 당시 전국적으로 행정조직이 완비된 한국기도교가 기록한 문서가 믿을 만한 자료라고 밝혔다. 제 8회 장로회총회가 1919년 10월 4일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개최됐는데 김두선 회장이 3.1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총회에 보낸 편지를 서기가 총대들에게 읽어주고, 부총회장이 기도를 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러한 교회의 기록들은 조선독립만세 사건에 대한 피해를 자세히 기록했는데 피해자나 피해교회의 정확한 소속과 복역자, 태형자, 수감자, 공소자, 악형받은 자, 수삭 악형자, 무죄방면, 피구타자, 총상자, 부상자, 사망자, 처역자의 기간, 미결수, 사망자, 불탄 교회, 방화로 예배 못드린 교회 등 명단과 숫자로서 기록한 당회록과 노회록, 총회록 등은 3.1운동을 둘러싼 진행, 피해의 증언 등을 유일한 1차 자료로서 보존과 고발 기능의 역학이자 예언자적 자세가 찬란히 빛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 일본 기독교인들의 도움도 컷다_ 민경배 박사는 3.1운동을 두고 반한적인 일본인들도 있지만 친한적인 일본인들도 도움을 많이 줬으며, 그 기저에는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적인 교통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반한적인 일본 인사들의 경우, 아끼츠지 이다시(서울 내 경성일본기독교회 목사)는 일본군의 진압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듯하지만 3.1운동을 폭동이라고 평가 절하했고, 아리따 도시오(일본 헌병중위)는 참혹한 제암리교회 학살을 자행했으며, 그의 상관 하세베 이와오 헌병중좌는 경성교회의 장로였다고 한다. 친한파로 알려진 우찌무라 간조(평신도신학자)는 한국교회의 피해보고는 날조라 핀잔했다고 한다. 친한파적인 인본 인사들은 일본법조계 인사들이었다고 한다. 1919년 2.8독립선언이나 3.1독립선언은 일본법에서 당연히 반역의 중죄였겠지만 판사들은 이 독립운동 피의자들 중 3%만 내란죄를 적용하고, 대부분은 출판법위반이나 보안법위반, 소요죄 등 가볍게 판결했다고 민 박사는 밝혔다. 하라 다까시(내각총리대신)은 1919년 코리아시츄에이션자료집에 3.1운동의 진압 과정의 불법학대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했고, 도꾸도미 소호(일본 천황과 막역함)는 수 십편 논설을 통해 인도주의를 외치고, 일경의 만행을 고발했으며, 나까라이 기요시(총독부 종교과장)는 3.1운동에 여러 종교가 참여했지만 기독교외에 타 종교는 이내 사라졌다는 평가를 했고, 한국은 자치를 해야한다고 공언했으며, 사이또(3.1운동 후 새 총독)는 한국교회와 친근히 지냈다고 하는데 그의 처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등의 숨겨진 이야기를 설명했다. ◎ 3.1독립선언서의 절반은 용서와 한중일 협력 희망_ 3.1독립선언서의 절반의 분량은 한국과 일본, 중국의 관계에 대한 거대한 비전과 협력구도를 담고 있다고 민 박사는 분석했다. 그 중 한국은 이 극동 3국이 맹우관계로 구성되도록 하는 것이 역사적 사명으로서 동양평화를 이룬 후 세계평화와 인류행복의 방향으로 전환하는 필연적 구도를 희망했다고 한다. 언더우드(H.G.Underwood)는 1908년 콜오브코리아에 한국인은 현대 진보에 대해 두 이웃을 능가하며 이끈다고 평가하고, 한국이 강하고 온유한 팔을 일본의 편견에서 벗어나고 보수적 태도를 지양시키고, 중국에게는 신뢰를 유지해서 3국이 세세무궁한 어린양의 영광을 찬양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멋진 기독교국가연합을 이루기를 기대하는 글을 썼다며, 외국인의 시각에서 한국의 큰 신앙적 면모를 평가한 내용을 제시했다. 한국인 자체도 세계를 향해 열린 믿음의 자세를 보였는데 남궁혁(1931)은 세계공황의 절정기였음에도 세계역사를 교권시대와 성경시대, 성령시대로 구분하고 성령시대를 한국이 끌어야한다는 비전을 선포했고, 김교신은 한국지도의 모양은 한국이 세계대륙을 등 뒤에 걸머지고 허리를 펴며 일어서는 모습으로 외치는 희망과 비전이 그 증거였음을 강조했다. 민경배 박사는 지금 세계는 3.1독립운동으로 인해 세계적 흐름과 궤를 같이 했기 때문에 세계적인 사명이 한국인과 한국교회에 맡겨진 것을 보는 중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의 완수를 노력해야 하고, 이를 위해 아시아권 최대 선교국의 위치요, 문화, 경제강국으로 만들어주신 자산을 활용해 신앙적인 노력을 더욱 기울이자고 촉구했다. ▲ 류석춘 박사(전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원장)는 이승만 박사가 1919년 2월 25일 윌슨 미국 대통령의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원칙에 따라 장차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는 조건 하에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둠으로서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킴을 청원하는 문서에 정한경과 함께 서명했고, 그 청원서는 윌슨 대통령에게 1919년 3월 3일에 전달되었다고 밝혔다. 청원서의 전달에 앞선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이 벌어졌다고 설명했다. 3.1운동은 대략 1919년 2월 8일 동경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하고, 그 사실을 접한 국내외 고무된 민족지도자들과 특히 천도고, 기독교, 불교 등이 포함된 민족대표 33인이 1월 21일 븡어한 고종의 장례예정일인 3월 3일 직전인 3월 1일에 대한독립만세(3.1운동)를 외친 거사로 설명했다. 한편 3.1운동 이승만 기획설이라는 것이 수년 전부터 다수의 주장이 제기되는데 대략은 이승만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파리강화회의에서 윌슨을 앞세워 한국의 독립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이 복안을 1918년 10월 하와이를 방문한 여운홍과 샤록스 선교사 등을 통해 국내의 지도자들에게 적당한 시기에 대중운동으로 펼치는 투트랙 전략이 있고, 다른 주장은 1918년 12월 워싱턴에서 구국운동하는 재미동포들에게 이승만의 밀사가 와서 윌슨을 통한 노예생활 청산 호소를 추진할테니 재미동포들이 국내에서 호응을 요구하는 내용, 2.8독립선언은 주도한 유학생들 다수가 이승만의 활동에 영향받았음을 증언, 또 다른 주장은 일본 경찰정보보고에 이승만이 파리강화회의에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들로서 이승만이 3.1운동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줬다는 내용들을 소개했다. 이상규 교수는 중국에서의 만세운동을 위한 신한청년단 조직이나 서울과 평양의 독립운동조직, 2.8독립선언 등은 기독교인 중심이었다며 민족대표 33인이나 48인의 구성에서도 50%는 기독교인이었고, 기독교적 네트워크가 필수요소였는데 이승만을 이 움직임에서 분리함은 불가하다고 밝혔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3.1운동에 영향을 미쳤음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며, 이승만은 국제정치를 꿰뚫어보는 사람으로서 그런 기회를 놓칠리가 없고, 패전국보다는 승전국을 상대로 해야하지만 어려운 일이었다는 점이 중요하지만 한국인 대다수는 아직도 이것을 이해 못한다고 류 박사는 토로했다. 이승만은 국제정치역할을 수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국내 저변에서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늘 역설했고, 그것이 승전국을 상대로한 민족자결의 가능성이 크다고 봤을 뿐 그 아래로부터의 독립요구가 3월 3일 위임통치 이전 혹은 어떤 시점 일지는 주장한 일도 없고, 동포들에게 원론적으로 독립요구가 필요하다는 호소를 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승만이 2월 25일 작성한 위임통치 청원서를 3.1운동 이전에 작성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완용보다 더한 매국노라는 비난을 하는, 다시 말해 3.1운동 이틀만에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것은 오해일 뿐이며, 더구나 이승만은 삼일운동이 벌어진 사실을 9일이 지난 3월 10일 알았을 정도로 당시의 지리적인 한계도 있었다고 밝혔다. ▲ 류금주 박사(청교도신학원 교수, 교회사학)는 한국에 기독교가 선교된 이후 제일 큰 열매는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이고, 건국을 이룬 사람은 우리 국부인 이승만 대통령이라면서 언더우드도 한국에 천국이 건설되었는데 그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천국이 된 것으로 평가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한 가장 큰 일은 이승만이라는 망국의 어려움 속에서 청년을 발굴해 키워낸 것이라고 외국인들의 입장에서 평가했고, 근래 한국에서는 전광훈 목사가 이승만을 잊혀진 과거에서 다시 끌어내 대중에게 공개했고, 이승만은 신학공부를 위해 미국에 갔다가 한 나라를 위해 활동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 류 박사는 청년 이승만은 미국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세운 배제학당을 졸업하긴 했지만 예수를 믿지는 않은 채 협성회보와 제국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독립협회와 연류되 만민공동회 활동을 하던 중 일제에 체포되어 한성감옥에서 정치범으로 종신형 복역을 하던 중이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청년 이승만은 1천 9백년 전에 죽었다는 사람이 현재 사람들의 영혼을 구한다는 바보같은 교리를 믿는 기독교인들을 신기하게 생각했지만 영어공부를 위해 접한 영어성경을 읽던 중 하나님께 기도하고 살려달라면서 그러면 한국교회와 국가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신앙인으로 변모하는 초현실적 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승만을 감옥에서 구출해 미국으로 보낸 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주한선교사들이었다고 한다. 선교사들은 1904년 말 조선을 떠나 도미를 하면서 많은 선교사들의 추천서를 써줬으며, 그가 감옥에서 약 40명의 동료 죄수들을 개종시켰다는 점을 부각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공부하며 세상에 부강한 나라는 다 기독교국가임을 깨달았고,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한미동맹, 기독교입국론 등 건국 4대 기둥 위에 세워질 자유 대한민국을 잉태하고 귀국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노년에 매일 하나님에게 자신이 늙어버렸다며, 우리 민족의 앞날에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하며, 국방이나 경제나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죽기 까지 했던 애국지사라고 류 교수는 설명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에서 한국교회와 이승만 등 기독교인들의 노력으로 강대한 국가가 되어가는 과정인 민족의 개화와 독립운동, 건국, 한국전쟁의 극복, 산업화, 민주화 등에 한국교회의 기여와 공헌이 절대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류 교수는 강조했다. 기독교사상과 신앙의 기틀에 의해 세워진 대한민국이지만 수십년이 지난 현재 사회 일부는 좌경화가 되어 겪는 어려움으로 체제가 허물어질 것처럼 두려워질 때 2019년 6월 8일 전광훈 목사가 한기총 대표회장으로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해 한국인들이 자각해야 함을 강조했던 것은 중요한 족적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국가의 안위를 그리스도인들이 고민하고, 애국적으로 기여해하는 이유에 대해 류 교수는 신앙은 체제의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정의했다. 이승만은 일본이 조선을 먹었지만 정신을 못 먹은 이유가 바로 한국교회 때문이었는데 구체적으로는 교회는 사람이 자유롭게 모이는 장소, 내부에 왕성한 활동력 보유, 합심하는 능력 보유, 국민의 원기를 유지케 함, 청년교육에 힘씀, 우상을 섬기지 않음, 덕성과 정의를 지닌 선교사의 영향을 받음, 혁명사상의 풍조가 동양에 전파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류 교수는 국가가 없다면 체제가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라며, 정교분리라는 개념은 정부가 교회에 간섭하지 못한다는 개념이며, 세상정부는 교회를 핍박하는 입법을 할 수 없고, 교회성직자 임명에 관여할 수 없다는 등의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류금주 박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법과 좌와 사망의 법이 공존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체제는 자유민주주의로서 본래의 기독교 신앙과 일맥상통함을 주장하고, 예수한국 복음통일의 시대적 사명수행에 노력하자고 강조했다. 이날 개회기도는 류지수 박사(전 예장합동선목총회 부총회장), 축사 유정우 박사(전 평택대학교 부총장), 사회 정용 박사(백석대학교 외래교수) 등이 담당했다. ▲ 개회기도 유지수 박사(전 예장합동선목회총회 부총회장) ▲ 축사 유정우 박사(전 평택대학교 부총장) ▲ 사회 정용 박사(백석대학교 외래교수) <한국교회신문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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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7

종교 검색결과

  •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월례발표 300회 기념
    ▲ 왼쪽부터 한정열 박사, 권평 전임원장, 민경배 명예원장, 유정우 박사, 류금주 박사, 고사무엘 목사 등이 기념케익을 절단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이하 한교사)은 매월 진행하는 월례발표회의 300회를 맞아 이를 기념하는 예배와 기념케익 절단식, 1997년 6월 창립한 동 연구소의 20년 역사를 되돌아보는 발제순서를 진행했다. ▲ 고사무엘 목사가 설교를 담당했다. ▲ 민경배 명예원장(초대 원장)은 20년간의 역사를 회고했다. ▲ 류금주 원장은 참석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 한정열 박사는 개회예배 인도를 담당했다. ▲ 개회예배 한정열 목사는 20주년 역사 발제에 앞서 진행된 1부 예배의 인도를 담당했다. 고사무엘 목사(전문연구원)는 성경책 고린도전서 12장 4~11절 말씀을 근거로 '변화 속에서도 하나 되는 교회'라는 제목의 설교를 담당했다. 고 목사는 한교사 월례발제 3백회를 맞는 중요한 날에 연배로는 막내에 해당하는 사람이 중대한 설교를 하게 됨은 영광스러우면서도 부담된다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오늘 설교의 키워드인 변화라는 단어를 생각 할 때 최근 한국인들에게 큰 관심을 받고있는 '건국전쟁(감독 김덕영, 출연 이승만, 류석춘, 브레진스키 등)'이라는 영화가 머리에 떠오른다며, 이 영화의 관람자들은 내용상 교과서가 제시하는 것과 다르니 진위여부를 떠나 혼란스러워하는 편인데 바로 이것이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의 특징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알지만 마음으로는 싫어하는 경향은 곧 변화에 부적응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교회는 몇가지 위험을 겪는 중인데 교회내 성도들이 자신이 가진 신앙의 연조를 무슨 권의의 요소인 것처럼 뽐낸다는 것과 2자신의 교회내 직분을 계급화 하려는 행위, 성경의 해석에 있어 자의적이거나 인본주의적 방법론을 차용하거나 교회 공동체의 목표인 선을 지키기 위한 협력 대신 내부에서 서로 싸움에 몰두하는 위기를 겪고 있음에도 겉으로는 교회가 대단히 성장한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모습을 보면 미래가 심히 걱정된다고 토로했다. 이날 읽은 본문 말씀의 고린도교회는 겉으로는 대단해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독선과 교만에 빠졌었는데 마치 지금의 한국교회 같은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한국교회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자만심보다는 겸손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인데 만약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모든 것을 되앗아가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겸손하려면 자신이 잘못됬음을 시인하는 자아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결과 낮아짐이 따라오지만 실제적 겸손의 원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비판, 겸손, 낮아짐 등이 결과물로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들은 자주 영적 열광주의와 독선적인 은사에 빠져 공동체를 돌보지 않기 일쑤라고 밝혔다. 독선적인 것에서 벗어나려는 해결의 열쇄는 십자가와 하나님을 바라 볼 때 작동한다고 바울은 말했다고 주장했다. 해결책은 사랑이라는 명제는 우리가 잘 알지만 현재 한국교회에는 사랑이 부족한 실정임을 지적했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바치며, 사람 만나기를 꺼리는 등의 현상이 발생하는데 심지어 목회자가 가정심방을 가려하면 성도가 거부하는 사태까지 흔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사랑에 대한 해결책은 새로운 것이 아닌 원론적인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이지만 한국교회의 실상은 교단과 교회, 이단 시비 등을 이용한 편가르기에 열심이라는 것으로 분석했다. 바울은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한다며 대한민국의 모든 교히들이 하나되어서 이와 같은 안좋은 모습을 없애야하는데 그 협력은 담장을 뛰어넘는 모습이어야함을 강조했다. 고 목사는 할아버지대 부터 자신까지 3대가 목회자 집안인데 자신이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많은 교회의 부흥회를 참석했는데 이 때 전혀 교파를 따지지 않고, 한 몸이요 한가지처럼 신앙생활을 했던 기억을 제시하고, 성도간의 담장을 쌓지 말 것을 제안했다. 우리의 사역에서 하나님만을 따라야 하지만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으로 인해 능력이 나온 것같은 모습을 하고있는 것을 회개하고, 은사나 능력 등은 하나님께서 덕을 세우시려는 섭리에서 시작된 것이므로 자신의 자질을 내세우지 말 것이며, 우리의 신자로서의 능력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 인한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으라고 촉구했다. 기도는 한정열 목사, 광고는 류금주 원장, 축도는 민경배 명예원장 등이 담당했다. ▲ 기념케익 절단식 월례발표회 3백회를 맞은 한교사는 이를 기념하는 케익절단식을 가졌으며, 여기는 민경배 명예원장, 류금주 원장, 권평 전임 원장 등이 참여했다. 민경배 명예원장은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을 중심으로 모인 교회사학자들은 하나님안에서 한 가지이므로 모든 일을 할 때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찬송가와 성경책에 내내 등장하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으 굳게 믿고, 교회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야하지만 더 중용한 것은 신앙 안에 한 형제로서 신앙이 여정을 가자며, 회원간의 친교를 중시하는 동료(Fellow)로서 최선을 다 하자고 촉구했다. ▲ 20년사 발제 류금주 박사(원장, 청교도신학원 교수)는 '한국교회사학연구원 20년사의 세계적 지평'이라는 제목의 주제를 발제함으로서 한교사의 창립과 관련된 정보 및 교회사학자 단체로서의 학분연구사상에 대한 제시, 한국과 일본, 대만 등의 교회사연구자들이 모여 동북아기독교사학협의회 등을 결성했던 이야기들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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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1
  • 신학적·신앙적 교회사 연구 20년
    ▲ 류금주 박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 청교도신학원 교수)가 주 발제를 했다. ▲ 유지수 박사가 사회를 담당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류금주 박사, 명예원장 민경배 박사)이 창립 20주년을 맞아 교회사의 연구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겪는 역사적인 사실을 다루면서도 역사 속에 동반되어지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려고 기울여온 노력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유지수 박사의 사회, 류금주 박사의 발제로 진행되었다. 류금주 박사(원장, 청교도신학원 교수)는 월례발표회가 300회를 맞는 지난 3월 7일 '한국교회사학연구원 20년사의 세계적 지평-동북아기독교사학협의회 10년사와의 유기적 전개'를 주제로 서현교회당에서 주제발제를 했다. 류 박사는 동 연구원이 창립되기 전 한국교회에서 교회사 연구자는 일반적인 사학과 출신으로서 비신학전공자가 많은 실정이어서 교회사를 연구함에 있어 성경과 역사시간 속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섭리를 고려함에 미진한 편이었지만 한교사의 출범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복음의 관점으로 한국교회사를 하기 시작해 20년이 흘렀고, 그 열매는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고 밝혔다. ◎ 교회사연구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류 박사는 한교사의 시작은 작고한 故 박옥선 이사장과 민경배 초대원장으로부터 시작되어 현재는 한교사 교회사연구의 두 기둥으로서 연구를 이끌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 하나님의 허락하심 없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전제하고, 교회에서 진행되고, 세상에서 발생한 일들을 연구하는 교회사연구자의 길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맡기신 천직으로 자임하는 사명의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민경배 박사가 지난 2018년 연희동에서 한교사 2기로 출범할 시 현장 휘장에 이사야서 43장 1절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라는 성구를 제시한 것은 현재 한교사에서 활약하는 시니어 및 주니어 교회사학자들이 소명의식을 가져야함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옥선 전 이사장은 본래 피어선신학교 재학시절 민경배 교수의 제자로서 인연이 깊었는데 이후에 민 교수에게 교회사를 연구하는 기구를 만들자고 강력히 제안해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이 지난 1997년 6월 18일 연세대학교 연합대학원 201호실에서 창립총회를 갖게되었고, 민경배 박사가 초대 원장으로 추대되었고, 박옥선 이사장은 같은 해 11월 개원총회 이후 12월 월례모임에서 추대되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류 박사는 설명했다. 박옥선 이사장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주자국으로 쓰실 것이라는 믿음 아래 한국교회 전체를 동 연구원이 보살필 사명감을 느끼고 있던 민경배 박사와 한 마음으로 동행했던 창립맴버였으며, 박 이사장은 동 연구원이 진행하 수많은 학술활동에 소요되는 경비를 후원해 교회사전문연구원으로서 설립해 많은 교회사 기성학자와 신예 학자들을 배출해온 성과를 냈다고 밝혔다. 신부(神賦)의 사명의식을 가진 교회사 전문연구원의 설립을 주도한 故 박옥선 이사장과 민경배 초대원장의 가장 큰 동기는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명령에 따라 행한 것"이라는 것이 류 박사의 증언이다. 박옥선 이사장은 1993년 장남 한규훈 목사와 함께 로마를 방문했을 시 "갈릴리에서 시작한 것이 로마로 건너와 사상과 색깔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방문 했을 때에도 비슷한 체험을 하면서 복음이 기독교역사를 거치면서 비틀어진는 원리를 체험하고 교회사 전문연구원의 설립을 진척하게되었다고 류 박사는 해석했다. ◎ 교회사연구는 섭리를 연구함으로 교회에 도움줘야 민경배 초대원장은 동 연구원이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뉴스레타' 1호 창간사를 통해 보면 한교사 설립은 신부의 사명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류 박사는 주목했다. 민 초대원장은 1호 뉴스레타 창간사에서 신학을 연구한 이들의 교회사 연구라는 자부와 사명을 안고 출발했으며, 교회는 다만 역사의 실체가 아이고, 신앙과 경건 그리고 섭리의 거대한 구도로 유기화된 조직이기 때문에 연구자의 돈독한 신앙이 요구되고, 아울러 신학적 소양과 깊이가 병행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고, 더불어 연구공동체로서 한 몸처럼 움직이면서 학문적 소양도 깊어지는 동반자 관계가 되어야 역량이 결속되고, 학파로서 구형(構形, 얽혀져 뭉친 모습) 될 수 있으며, 연구원이 후학의 발굴과 지도에 노력해야 함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류 박사는 위의 글 중 언급된 신학을 전공한 교회사 연구를 언급한 대목에 대해 (당시 만연했던) 신학을 비전공자들이 교회가를 연구하는 것을 의식한 것이었다면서 이는 곧 교회를 역사적 실체로만 보고 교회사연구자들에 대한 지적이며, 민경배 박사는 이에 대해 "교회는 다만 역사적 실체만이 아니라 신앙과 경건 그리고 섭리의 거대한 구도로 유기화 된 조직이어서 연구자의 돈독한 신앙이 요구되고, 신학적 소양과 깊이가 병행한 해석이 반드시 동반하여야 하는 것이다"라는 역설을 제시한 것이고, 한교사는 신앙과 신학적 소양을 겸비한 교회사연구를 20년간 진행해왔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연구원의 신부적 사명의 특징으로서 하나의 기백으로서 한 몸으로 뭉친 연구공동체의 확립은 하나의 학파로서 섹트적 결속을 이루고, 후학의 발굴과 후원, 신부적 교회사연구의 계승 등이 한국교회에 이바지 하려는 모든 것들이 현재 후학 교회사연구자들이 활발히 유입되어 활약하고 있음으로 인해 추구하는 방향대로 가고 중으로 평가했다. ◎ 교회사연구 사명은 세계적 지평을 향해서 한교사는 초기부터 한중일을 중심으로한 동북아시아 교회사연구를 추구했는데 '동북아 대학원생 교회사 심포지엄(1999년 2월 9일)'을 개최했고, '동북아기독교사학협의회(1999년 11월 24일 창립~2010년 해체)' 를 한국, 일본, 대만 등의 교회사학자들이 참여해 창설하고, 10차례의 국제세미나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아시아를 아우르며 세계적인 교회사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방향으로 사역해 왔다고 류 박사는 밝혔다. 류 박사는 한교사의 20년 역사 중 전반기는 동북아기독교사학협의회(상임의장 민경배 박사) 10년사와 겹친다면서 기간 및 전개과정이 겹치는데 이것은 동 연구원의 신부적 사명과 비전이 세계적으로 확대 구형되는 사역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초대원장 민경배 박사는 한교사의 창립시부터 '신학을 연구한 이들의 교회사의 연구'라는 생명을 부리는 사명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생명을 부리고, 책임지도록 하는 하늘이 허락하신 자부함은 동북아기독교사학협의회의 창설에서도 그 사명의식이 차고 넘쳤다고 평가했다. 동 기구의 명칭은 한교사의 복안은 '동북아교회사학협의회'였지만 일본측이 '동북아기독교사학협의회'라는 명칭을 들고 나와 조정하는 과정에서 한국측은 '기독교사학'이라는 어휘가 실제적인 '교회사'라는 단어에 비해 추상적이긴 하지만 후자를 사용할 것으로 양보하고, 포용했음을 설명했다. 류 박사는 아시아 3국의 교회사가들이 10차례의 국제회의를 진행하면서 모두 그 활동에 만족하고, 상호간의 적극적인 협력을 기울이던 중 후반부로 가면서 일본측은 국가 단위의 회원활동이 아닌 개인참여를 주장하고, 세부활동에서 학술활동 외에 회원간 친교의 문화를 지적하면서 자신들의 결정을 통보하는 느낌을 받아 처음 시작한 취지가 흩어지기에 한국측 주도로 해체를 결의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민경배 명예원장은 이에 대해 동북아기독교사학협의회 등을 진행함에 있어 현재 한교사의 기성 교회사학자들이 대부분 대학원생일 때 시작되었고, 실무준비도 대학원생들이 진행했다는 특징이 있었다면서 그같은 경험상 특혜는 학계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귀한 기회였고, 또한 학술로만 뭉치자고 한다면 모일 필요가 없이 연구자 각자가 집에서 조용히 공부하면 되는 셈이며, 다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모여 학술과 교제를 갖음은 연구성과를 나누고, 연구과정을 격려하는 목적이 더욱 강한 것이기에 앞으로도 한교사는 교제가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주장할 것이며, 이러한 노력으로 한국교회사의 연구는 물론 그 영향력이 세계각처로 미치도록 하는 한교사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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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 일반(해외, 국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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